|
Article in other languages:
|
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년 9월 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고 본다. 한편에선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이 결과로 한국, 타이완 등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였다.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4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통해 일본인을 비롯한 조선인, 중국인, 동남 아시아인 등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하였으며,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또한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재일 조선인 포함),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공군은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의 피해는 극히 심하였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 전선, 동부 유럽 전선과 중일 전쟁·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 전선만을 얘기할 경우 히틀러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배경 및 원인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년∼1933년의 세계경제대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가속화 시켰으며,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게되었다.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독일이 재무장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전으로 탈환하여 2차대전의 서막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경과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유럽 전선에서 초기에 독일은 전격전의 입안으로 초기에 백색 작전, 황색 작전, 낫질 작전, 베저 작전을 성공시켜,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북부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 공격을 감행하려 했던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후 나치 독일은 동쪽으로 관심을 돌려 1941년 이탈리아가 점령하지 못한 그리스와 독일과의 동맹에 반대하는 정변이 발생한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를 모두 점령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동맹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소련에 대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여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보급 부족과 겨울의 시작으로 인해 패퇴하였고, 1942년에는 코카서스와 카스피 해 연안의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이른바 청색 작전을 입안하여 남부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이끄는 6군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밀려 전멸하였고, 코카서스로 진격했던 군대들도 후퇴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독일은 치타델 작전을 입안하여 소련의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총 공세를 감행했으나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다시 소련군에 패하면서 기울어 밀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부족한 병력과 병참 지원에도 불구하고 에르빈 롬멜 장군과 북 아프리카 군단(DAK)이 선전하였으나, 1943년 초 튀니지에서 항복하면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이후 연합군은 시실리 및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독일은 플란데 작전을 발동,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복귀시킨 후, 사실상 점령군 행세를 하며 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이 이탈리아 전선은 유례없는 산악전으로 진행되면서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한편 독일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1942년부터 소위 대서양 방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수많은 외국 포로가 동원되었으며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까지 연결되었다. 미군과 영국군은 1942년의 디에프 기습 공격에서 얻은 전훈을 참고하여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서부에서는 흔히 벌지 대전투로 불리는 라인 강 수비 작전으로, 전세의 재역전을 노렸으나, 양측에서 압박해 오는 동서 연합군을 막을 힘은 없었다. 결국 5월 1일, 소련군에게 베를린을 점령당하고, 엘베 강의 토르가우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서 악수하는 와중에 1945년 5월 7일 서부 연합군에 항복하고, 5월 8일에는 동부의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아시아와 태평양 전선태평양 전선은 애초에 일본이 국민당과의 중일 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고 전쟁 기간 중에 비시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는 등 교전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중화민국과 장개석 정권을 지지해 왔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이른바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아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광의 수출 제한을 발동하면서 일본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경제 위기의 초래를 우려하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영국령 말레이 반도, 버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자원 산지들과 나아가 인도, 태평양의 섬들을 장악해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일본을 중심으로 돌리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제창하였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심화되자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주의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면서 전쟁은 크게 확대되었고, 초반 기습의 효과를 톡톡히 누린 일본군은 단숨에 홍콩, 동부 미얀마(버마), 서부 뉴기니 섬,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인도양의 대부분과 솔로몬 제도까지의 모든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초기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호주령 남 뉴기니의 주요 항구인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노리려 하였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패전하였고 해전에서도 산호해 해전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에 의해 둘리틀 공습(1942년 4월 18일)으로 주요 도시가 최초로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고,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의 격멸과 태평양에서의 재해권 완전 장악을 위해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세에 나섰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제해권과 제공권에 큰 공백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망루 작전을 입안하여 남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하는 작전을 세우고 과달카날 섬을 필두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어진 육전 및 해전에서 참패하였고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필리핀마저 상실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레이테 해전에서 보유 해군의 대다수를 상실하였다. 미얀마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에서도 대패하자 결국 한반도의 제주도와 일본 열도의 규슈, 오키나와 섬을 최후의 방어전장으로 설정하고 항전하려 했으나,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으로 방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으로 15만이 넘는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1945년 9월에 연합국측에 참가하여 일본을 무너뜨리는 정책을 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23일 수개월간 참혹한 전투가 벌어지며 일본이 끝까지 사수하려 했던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었으며,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받고 1945년 8월 8일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소련이 만주로 진격하면서 연합군이 본토 상륙을 개시하기 전에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였다. 결과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대한민국도 1945년 9월에 연합국측에 참가하기도 전에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자 대한민국은 결국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리고 만다. 종전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소련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는 않았으나, 8월 폭풍 작전으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하였다. 또한 과거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 할양하였던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탈환하였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은 일본의 전권대사였던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와 미국 측의 맥아더 원수가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 해군 미주리 호의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연표1939년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사용된 무기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무기 개발 금지와 국방군 제한 등을 당하였으므로 다수의 무기 개발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소련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는데, 히틀러의 집권 이후 공공연하게 베르사유 체제의 철폐가 주장되고 히틀러의 반공 정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협력 관계가 청산되었다. 독일군전차전투,공격,폭격기대전차 무기일본제국군전차전투,공격,폭격기이탈리아군전차붉은 군대 (소련군)전차전투,공격,폭격기영연방군전차전투,공격,폭격기미군전차전투,공격,폭격기대전차 무기2차 대전 관련 주요 학살 사건
참고 자료
참고 전쟁
Questions for article: 2 차대전 무기, สงครามโล?ครั้งที่สอง, 크림반도 독일, 요하임 파?? |
|||||||||||||||||||||||||||||||||||||||||||||||
This article is from Wikipedia. All text is available under the terms of the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IHS Europe: Infrared Heating Systems for Home and Busi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