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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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이후의 고구려를 고려로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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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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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개국 연도 918년
멸망 연도 1392년
수도 개경
종교 불교, 토속신앙
개국자 태조 왕건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의 초상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의 왕조로서 918년태조 왕건궁예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후백제까지 통합하여 나라를 세운 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50여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왕건 이래 임금의 성씨는 왕씨였다.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등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송나라와는 우방과 같은 관계를 맺었다. 수도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서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했다.

그러나 원나라(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지배를 당하면서 국력이 쇠퇴했고,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는 멸망하였다. 고려에는 통일 신라 시대의 복장이 그대로 전래되는데, 그 예로 공용으로 입던 예복용 치마인 '상'과 오늘날 한복 치마처럼 어깨에 끈이 달린 바지 말군, 바지 가랑이에 버선이 달린 바지 백주고 등이 예이다.

목차

역사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9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궁예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건원칭제하기에 이르렀다.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로써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고 쫓겨났다. 이에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926년 발해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

광종의 개혁 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황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된 반면, 노비들은 양민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안정되었다.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시행하였다. 과거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또한 광종은 칭제건원하여, 연호를 광덕, 준풍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문벌 귀족이라 불리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황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요나라의 침공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거란 전쟁입니다.

10세기 초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는 수차례 외교적 충돌이 있었다.

처음 요나라는 8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다(993년). 요나라는 고려가 영유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요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의 협상에 나섰다. 이 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요나라로 부터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가 군대를 거둔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빌미 삼아,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나라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1010). 이 때 개경이 일시 함락되는 난관을 겪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요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였다. 이에 요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공해 왔다(1018년). 개경 인근까지 침입했던 요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의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할 지경이었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연달아 참패한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나라를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요나라를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 [2]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 완옌부의 추장이 다른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충돌에서 패전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별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려는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고려 조정은 다시금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요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1115),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격심한 정치적 분쟁을 겪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3]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황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임금의 측근 세력들은 임금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물러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아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천도하여 새 황궁인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4]

무신 정권의 성립

무신 정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에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몽골과의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몽골 전쟁입니다.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장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1231년),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 에서 장수 살리타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5]

원의 내정 간섭

이 부분의 본문은 원의 간섭기입니다.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 임금은 몽골 공주와 결혼하여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황실의 호칭과 격이 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었으며 역시 격이 낮추어졌다. 또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제주도에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이른바 권문세족이라고 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몽골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권문세족의 불법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일반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가운데서도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한 토지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새로운 농업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사람들은 주로 지방의 중소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점차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등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던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으며, 또한 토지 탈점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여, 결국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멸망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反元)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힌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데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후 고려는 명나라와 철령 이북의 땅을 둘러싸고 영토 갈등을 빚었다. 끝내 고려 조정은 요동 수복을 결정하고, 정벌군을 출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벌군 사령관 이성계는 압록강 어귀 위화도에서 나라 사정이 좋지 않기에 명나라와의 전쟁이 어렵다는 이유로 군대를 개경으로 되돌린다. 이른바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는 고려 조정을 장악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이성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본격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나아가 1392년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태조ㆍ광종은 황제를 칭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의 군주들 또한 스스로를 짐(朕), 수도를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을 폐하(陛下), 차기 보위를 예약한 임금의 장남을 정윤(正胤) 또는 태자(太子), 군주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와 칙(勅)으로 부르는 등 제국의 제도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3세기 원나라의 내정 간섭 이후, 모든 제도가 격하되었다. 짐(朕)도 고(孤)로, 폐하(陛下)를 전하로, 태자(太子)도 세자(世子)로 낮아졌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12세기 후반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중앙 관제

고려의 중앙 관제성종 때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한다. 이는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이러한 2성 6부에서는 국정 전반을 처결하였다. 그밖에 왕명의 출납(出納)‧군기(軍機) 등의 일을 맡아보던 중추원(中樞院)과 백관을 감찰‧탄핵하던 어사대(御史臺),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를 맡은 삼사(三司)가 있었다.

지방 행정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성종 초에 정비되었으며, 전국을 5도 양계와 경기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안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는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이 와서 활발하게 무역하여 인삼, 농기구,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유리 공예품, 서적, 비단 등을 수입했다.

사회

고려사회는 신분사회로서 중인, 평민, 천민, 양반 관료 등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제도를 두어 영국의 귀족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다. 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 소, 부곡민, 화척, 재인 등이 있었다.

문화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기타

고려(高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리’라는 의견이 있다.[6]

나라이름을 나타낼 때도 ‘려’로 읽는다고 밝힌 사전과 쪽수는 단국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한국한자어사전》 권4(1996년 11월 3일) 991쪽, 두산동아(옛 동아출판사 포함)에서 펴낸 《동아백년옥편(탁상판)》(초판 7쇄, 2003년 1월 10일) 2264쪽과 《동아 한한대사전》(1982년 10월 25일) 2181쪽 등이다.

반면에 나라이름을 나타낼 때 ‘리’로 읽는다고 밝힌 사전과 쪽수는 성문사(聖文社)에서 펴낸 《성문대옥편》(1997년 5월 30일) 593쪽, 민중서림에서 펴낸 《획수로 찾는 실용옥편사전》(2002년 1월 10일) 923쪽, 인하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고금한한자전》(1995년 11월 15일) 150쪽, 교육출판공사에서 펴낸 《한한대사전》(1996년 5월 25일) 1772쪽과 《한한대사전》(1997년 11월 20일) 1773쪽, 범우사에서 펴낸 《한·일·영·중 겸용 한한대사전》(1992년 3월 10일) 1195쪽 등이다.

또한 둘 다 밝혀 놓은 사전도 있는데, 민중서림에서 펴낸 《엣센스 한자사전》(초판 5쇄, 2003년 1월 10일)이다. 그 책 1847쪽에서 ⑩번 항목에서 “나라이름 려”라고 밝힌 다음 ❿번 항목을 덧붙여서 “원음 ‘리’”임을 밝혔다.

함께 보기

주석

  1.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75쪽
  2.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4쪽
  3.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5쪽
  4.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0~1쪽
  5.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6~7쪽
  6.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61쪽. ISBN 89-7474-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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